생애와 업적
생애와 업적
불연(不然) 이기영(李箕永) 선생은 1922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불연'은 원효스님의 <금강삼매경론>의 "불연지대연(不然之大然)"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호(號)이고, 법명은 '설봉(雪峯)' 또는 '서봉(瑞峯)'입니다.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하고, 1954년에 벨기에의 루뱅(Louvain)대학에 유학하여 동 대학원에서 1960년에 <불교에서의 참회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60년에 귀국하여 동국대, 서울대, 서강대 등에서 불교학, 종교학, 프랑스어, 미술사 등을 가르쳤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엘리아데를 최초로 소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국대에서 인도철학과를 창설하고 교수를 지내며 비교사상연구소장, 교양학부장, 불교대학장을 역임했습니다. 중간에 영남대로 옮겨 교수, 교양학부장, 신라문화연구소장을 지냈습니다. 이어서 국민대학장(지금의 총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1978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창립시에 민족문화대백과 사전 편찬 사업을 총괄 지휘하며 그 기틀을 잡았습니다.
구미 불교학계에서 20세기 최고의 석학으로 꼽히는 에티엔느 라모트 교수 밑에서 불교문헌학과 불교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 불교학계에서 원전을 활용한 정치(精緻)한 연구 방법을 소개함으로써 한국 불교학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귀국 후에는 한국 불교, 특히 원효사상의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원효사상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심도 있게 연구하고 현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국내외 불교학계에서 원효의 불교사상을 선양한 세계적인 권위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74년에 한국불교연구원을 창립하여 불교 연구와 재가불자 교육에 힘썼습니다. 한국불교연구원에서 행해진 각종 연구 및 교육 프로그램의 창안과 운영, 재가 불자 양성은 모두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의 현대 불교계에서 대표적인 재가불교 지도자로서 승속을 불문하고 숭앙을 받았습니다.
1996년 11월 9일 한국불교연구원의 국제학술회의를 주최하여 개회식을 진행하던 중 기조강연을 마치고 쓰러져 홀연히 타계했습니다. 이로 인해 '학술열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비된 유해는 경주 남산의 한자락에 뿌려졌고 추모비가 인근의 보리사에 세워졌습니다. 아울러 추모탑이 한국불교연구원 부설 유마정사 경내에 있습니다.
경주 보리사에 세워진 추모비
비문
현대 한국 불교를 이끈 석학이자 재가 지도자이신 불연 이기영 선생이 여기 경주 남산에 계신다 선생은 1922년 황해도 봉산에서 태어나 벨기에의 루뱅대학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으셨다 귀국 후 동국대학교에 인도철학과를 창설하여 후학을 기르시며 원효사상 등의 명저를 저술하여 한국 불교계에 새바람을 몰고 오시고 한국 불교학을 현대화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 원효사상의 발굴과 연구를 통해 원효스님에 대한 관심을 국내외에 널리 일으킨 이 분야 연구의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권위자이시다 재가 불교의 육성 및 보살정신의 생활화에 힘쓴 실천적 종교인이기도 하셨으며 대승불교 사상에 대한 투철한 이해와 동서양 사상에 대한 폭넓은 편력을 바탕으로 불자들에게 불교의 참뜻을 유마거사 같은 혜안과 부루나 존자 같은 변재로 깨우치셨다 만년에도 불교계의 지도자로서 한국 불교의 혁신과 발전을 위해 건강을 살피지 않고 힘쓰시더니 1996년 11월 학술회의의 기조강연을 마치고 나오시어 홀연히 74세를 일기로 원적하셨다 우리 시대의 원효라 불린 선생은 평소 원하시던 대로 원효스님이 거닐고 화랑들이 수련하던 신라의 불국토 남산의 소나무숲 사이로 돌아가셨다 가신 뒤 여덟 번째 맞는 부처님오신날 선생이 즐겨 찾으시던 남산의 미륵곡에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며 이 비를 세운다
유마정사에 세워진 추모탑. 조각가 최인수 선생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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